요즘 한창 뜨고 있는 부산 동구 '초량 이바구길'은 부산역 맞은편 333번 버스정류장이 기점이다. 이곳에서 옛 백제병원~동구 인물담장~168계단~김민부 전망대~당산~이바구공작소~장기려 기념 '더 나눔센터'~유치환의 우체통~게스트하우스 '가꼬막'까지 숨가쁘게 이어진다. 가파른 길을 오르다 보면 꽃샘추위에도 이마에 구슬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초량 이바구길에서 만나는 뭇 공간들이 예사롭지 않지만 '장기려 기념'이란 부제를 달고 그제 개관한 '더 나눔센터'는 가장 의미로운 장소라 하겠다.
'한국의 슈바이처' 성산 장기려(1911~95) 박사. 6·25 때 북에 부인과 5남매를 두고 둘째 아들만 데리고 월남했다. 51년 영도에 복음병원(고신의료원 전신)을 세워 피난민 무료진료를 하면서 인술을 펼치기 시작해 아미동 부산의대 뒤편 창고에 방치된 행려환자들을 제 식구처럼 돌봤다. 68년 국내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인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창설, 가난한 이들이 맘 놓고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했다. 76년 수정동에 청십자병원을 설립해 무료진료와 다양한 사회봉사활동을 계속했다. 복음병원장 시절 치료비를 낼 수 없는 환자에게 병원 뒷문으로 도망치도록 일러주거나, 잘 먹어야 하는 가난한 환자의 처방전에 "닭 두 마리 값을 내 주시오"라고 써 준 일화는 생각할수록 가슴 뭉클하다. 그가 숨을 거둔 곳은 복음병원이 옥상에 마련해 준 20여 평 관사였다.
장기려 박사 나눔정신 계승한 복지공동체
선심성 아닌 선순환 착한 복지모델 꿈꾼다
평생 나눔과 청빈의 삶을 살다 간 장 박사의 정신 계승과 새로운 복지모델 창출을 모토로 '더 나눔센터'가 문을 열었다. '더'는 '더욱'이란 뜻. 개관일을 장 박사가 원장으로 근무하며 의술을 펼쳤던 복음병원 초량분원 개원일인 66년 4월 1일에 맞췄다. 지역주민 400여 명이 자발적으로 참석했을 정도로 개관식이 성대했다. 이날 내빈석에 조용히 앉아 있는 신사 한 분이 눈에 띄었다. 장여구(50) 서울백병원 응급실장이자 외과과장으로, 다름 아닌 장기려 박사의 친손자.
나눔의 정신도 유전하는 것일까. '장기려 선생 기념사업회' 이사이기도 한 장 실장은 2008년부터 1년에 두 번 동남아지역 의료봉사활동을 해 오고 있다고 했다. 기념사업회와 백병원이 공동주관하는 의료봉사단의 의료 파트를 이끌고 있는 것. 장 실장과 기념사업회는 장기려 박사 유품 수집 등 '더 나눔센터' 개관에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장 실장은 "할아버지를 기념한 센터가 문을 연 것은 감사하고 의미 있는 일이죠"라며 담담하게 말했다. 아버지인 고 장가용 박사도 외과의였으니, 3대가 '칼잡이' 의사인 셈.
'더 나눔센터'는 이름 그대로 '더욱 많이 나누는' 공간이다. 일자리와 배움과 건강과 마음을 나누는 곳. 제일나라병원, 문화병원, 봉생병원 등 지역 내 6개 병원이 돌아가며 주 2회 무료 건강검진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장기려 기념관과 마음나눔방은 관광객과 주민 간, 주민과 주민 간의 소통공간으로 활용된다. 작은도서관에선 독서 프로그램이 운영돼 평소 책과 거리가 먼 어르신들에게 책 읽는 즐거움을 선사할 예정이다.
'더 나눔센터'는 단순한 복지관이 아니다. 새로운 복지모델 창출을 궁극적 목표로 하는 복지공동체이다. 일방적인 선심성 복지가 아닌 상보적인 선한 복지가 그 지향점. 즉, 교육과 근로와 소통을 통해 복지가 복지를 낳는 복지의 선순환·확대재생산 구조를 만들겠다는 의미다. 예컨대 어르신들을 상대로 동화구연 자격증반을 무료로 운영해 자격증을 취득하게 한 뒤 이들로 하여금 동화구연가로 봉사하도록 하는 것이다. 기념사업회의 해외의료봉사 때 저소득 다문화가정 자녀들을 동행하도록 함으로써 글로벌 봉사 마인드를 키우는 계획도 포함돼 있다. 지역 협동조합도 운영될 전망이다.
'더 나눔센터'는 초량동 산복도로에 인접한 작은 공간에 불과하지만 그 지향점은 지고지순하다. 장기려 박사의 나눔과 무소유 정신을 밑거름으로 해 동구형 복지가 센터 앞뜰에 늘어선 은목서의 꽃향기처럼 활짝 피어나 방방곡곡 퍼져 나가기를 기대한다. hohoy@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