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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십자 조합의 성자’장기려 선생 10주기기사입력 2005-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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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려병자의 아버지,의료보험의 효시 ‘청십자조합’ 창설자,무소유와 무욕의 삶,시대의 성자,인의(仁醫),국내 최초 간 대량 절제술 성공…. 참 의사이자 참 스승,참 기독인 등으로 수식어가 부족한 성산 장기려(1911∼1995) 박사의 타계 10주기를 맞았다. 성산 장기려선생 기념사업회(이사장 이영덕)는 10일 오후 3시 서울 동숭동 서울대학교병원 교회에서 추모강연회를 연다. 이만열 국사편찬위원장을 강사로 초청,그의 업적과 교훈을 되살펴볼 계획이다. 부산 고신대학교 부속 복음병원은 19∼24일을 장기려 선생 추모주간으로 정하고 22일 추모예배를 드린다. 장기려 박사는 1928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며 의료계에 투신,1995년12월25일 성탄절에 타계하기까지 현대 의료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며 언행일치 신행일치의 삶을 살았다. “한 병원 복도에 허름한 차림의 중년 여자가 시름에 젖은 얼굴로 앉아있다.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의사가 생활이 어려워 병원비를 마련하지 못했다는 중년여자의 사연을 들었다. 그 의사는 남편을 데리고 나와 몰래 병원 뒷문으로 나가라고 말하며 나중에 꼭 병원비를 갚으라고 말한다.” 춘원 이광수의 소설 ‘사랑’에서 주인공 안빈이 한 행동이다. 상대를 믿고 배려하는 안빈의 행동은 장 박사를 모델로 하고 있다. 그는 실제로 부산 복음병원에서 병원 직원 몰래 돈 없는 환자들을 뒷문으로 나가도록 하고 치료비를 대신 내기도 했다. 그는 월급의 거의 대부분을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사용됐고 자신은 병원 옥상의 20평 남짓한 관사에서 살았다. 경성의학전문학교 입학 전 그는 “이 학교에 들어가게 해준다면 의사를 한번도 못보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고 서원 기도를 했고 그는 이 약속을 평생 지켰다. 1942년 평양연합기독병원을 거쳐 1943년 평양도립병원장 겸 의과과장,1947년 김일성대학 의과대학 외과학 교수겸 부속병원 외과과장으로 일했다. 1948년에는 북한 과학원 최초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1951년 부산 영도 제3교회 창고에서 무료의원을 시작했다.복음병원의 시작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25년을 일했다. 1968년에는 ‘건강할 때 이웃 돕고,병 났을 때 도움받자’라는 취지로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발족했다. 정부의 의료보험제 실시보다 10년 앞선 일이었다.1969년 간질환자 치료를 위한 장미회를,1976년 한국 청십자 사회복지회를 설립했다. 그의 청빈한 삶과 타인을 위한 인술은 부산시민상 대한의학회학술상 국민훈장 막사이사이상 호암상 등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상받기를 거절하고 시상식에 나가지 않는 일도 있었다. 그는 오직 믿음으로,이름도 빛도 없이 살다가고자 했던,그의 유언처럼 ‘오직 주를 섬기다가 간 사람’으로 기억되길 원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진정한 기독인,위대한 스승,검소하고 청빈한 삶을 살았던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기억하고 그의 모든 것을 배우려고 하고 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전재우 기자 jw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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