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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체험수기 봉사에 대한 나의 생각
2013-03-13 14:42:52
장지인 조회수 1342

교내 봉사체험수기 대회 수상작

영동고등학교 2학년 장지인

 

  내가 처음 봉사를 시작한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봉사가 영어, 수학처럼 과목의 하나라고 생각할 만큼 나의 봉사에대한 생각은 무지했다. 어머니가 어머니봉사단회장을 맡고 계셨기 때문에, 자연스레 어머니를 따라 강남구청, 강남보육원, 다니엘학교, 장애인마라톤대회, 무료진료소 등을 따라다니며 수많은 봉사를 했다.
처음에는 귀찮고 공부할 시간을빼앗기는 것 같아 손해보는 것 같은 생각도 들었지만, 봉사시간이 쌓이는 기쁨과 주변 사람들의 칭찬, 무엇보다 강남구의회 의장상, 서울시 교육청 교육감상, 한국자원봉사회 회장상 등 교내교외 수많은 봉사상들이 나에게는 자랑거리였다.
 그러다가 '봉사'와 '진로'에 대한 나의 생각을 완전히 바꿀 사건이 일어났다. 오래전부터 해외의료봉사를 하고계신 아버지를 따라 캄보디아로 의료봉사를 가게된 것이다. 그리고 8일간의 천막 안 의료봉사는 나의 봉사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바꿔놓았다. 잘 먹지도 못하고, 씻지도 못하고, 땀이 비오듯 흐르는 찜통 더위 속 천막 안에서 의사선생님들과 간호사들은 하루 종일 서서 수술을 하셨다.
그러나 아무도 인상조차 쓰는 사람이 없었다. 진료를 받으려고 줄을 선 환자들도, 사탕이라도 먹을까 해서 구경온 아이들도, 같이 간 대학생형들도, 의사선생님들도, 간호사누나들도 거기 있는 모두가 행복하고 즐거웠다.
이상한 일이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도 아버지도 나에게 의사가 되라고 강요한 적은 없지만, 평생 의사로서 봉사의 길을 걸으셨던 증조할아버지(장기려박사) 덕분에, 나는 늘 의사가 되어 다른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을 받아왔다.
어릴 때부터기자들 인터뷰를 종종 받곤 했는데, 결국 마지막 질문은 늘 같았다. "장기려 할아버지처럼 훌륭한 의사가 될 거죠? 의사가 되면 무엇을 할 건가요?"
그러면 난 늘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해줬다. "
할아버지처럼 훌륭한 의사가 되어서 불쌍한 사람들을 돕겠습니다." 
거짓말이었다. 오히려 그래서 더욱 의사가 되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는 내가 남을 도울 때, 쉽게 큰 힘을 보탤 수 있으니'의사'라는 직업이 가치가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왜 남을 위해 나의 귀한 시간과 돈을 뺏겨야하는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천막 안에서야 비로소 아버지가 왜 나를 캄보디아까지 데리고 갔는지 이해가 되었다. 아버지는 내가 스스로 깨닫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봉사'란 내가 그들에게 가진 것을 조금 나눠주고, 훨씬 더 큰 것을 얻는 것이라는 것과 재능기부를 하기에 '의사'는 참 좋은 직업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중학교 시절 봉사를 하면서도 별로 힘들이지 않았던 것은 많은 상을 받거나 칭찬을 받아서가 아니었다. 봉사시간이 쌓여가기 때문도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봉사로 인해 보람과기쁨을 얻고 있었던 것이다.

 

2학년이 되면서 나는 그 때 캄보디아를 같이 갔던 선생님들의 권유로 시간이 나면 주말마다 등촌동 사회복지관 무료진료소(장기려 기념사업회)에서 봉사를 한다.
그곳에 도착하면 아버지는 진료를 보시고, 나는 약포장 및 청소 등을 한다. 나는 그곳에서 가장 어리기 때문에 잡다한 허드렛일들을 하면서도 빨리 의대생이 되어서 형들처럼 선생님 옆에서 돕는 큰일을 하고 싶었다. 그 할머니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곳에 오시는 분들은 대부분 나이가 드신 할머니, 할아버지로, 어려워서 병원에 갈 형편이 안되는 분들이 대부분이다.그런데 백발의 허리가 많이 굽은 할머니 한분은 늘 아침 일찍 오셔서 진료를 받으신 후에도 오후까지 복도 벤치에 앉아계셨다. 어떤 날은 진료가 모두 끝나고 청소할 때까지 우리들 모습을 바라보고 계셨다. 어느 날 같이 봉사하는 형에게 물었다.

 

 “형, 저 할머니는 왜 주말마다 오세요? 많이 아프세요?
” 형은 웃으며 말했다. "
저 할머니는 특별히 아프시지도 않은데.. 거의 주말마다 나오셔. 게다가 뒤에 환자들이 밀려 있어서 너무 바쁜데, 계속여기저기 아프다고 나가시지도 않고...그래서 그냥 비타민만 처방을 해 드리는 거야. 그 약을 드시고 일주일동안 아프지않고 기분좋게 지나갔다니.. 매번 처방해드릴 수 밖에" 
그러던 어느 날 다른 날과 같이 봉사를 끝내고 청소를 하고 있는데, 그 할머니가 벤치에 앉아 나에게 손짓을 하셨다. 가까이 다가가니 할머니는 나에게 초콜렛을 내미시며, "나도 이런 손자하나 있으면 좋을 텐데." 하고 손을 쓰다듬어 주셨다.
할머니의 주름진 손이 내 손에 닿는 순간, 나는 할머니에게 필요한 것은 명의의 진료가 아닌 대화 할 수 있는 벗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항생제 처방보다 한마디 따뜻한 말이, 사람의 손길이 이 할머니에게는 두통약이고 관절약일지도 몰랐다.
나는 그 날 이후 할머니가 오시면 가장 먼저 챙겨드리고 친구처럼 할머니의 이야기를 모두 다 들어드렸다. 할머니 얼굴은 참 많이 밝아지셨고 나도 그 모습을 보면서 행복했다. 어느 날은 청소 안하고 놀기만 한다고 직원 분께주의를 받기도 했지만, 그래도 말을 하고 싶어 하시는 할머니를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할머니를 통해 작은 일도 쓰임에 따라 큰 봉사가 될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기부'에 대한 나의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 나는 사회적 약자를 돕기 위해서는 무조건 경제적 능력과 사회적 지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1년 전 어느 날 지역신문에서 본 초등학생의 봉사에 대한 글은 참 나를 부끄럽게 했다.
기부는 대그룹 회장이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때부터 내 용돈 12만원 중 매달 다니엘학교와 강남보육원에 만원씩을 보내고 있다. 덕분에 용돈을 좀 더 아껴야 한 달을 버티지만, 미국의 갑부 록펠러라도 된 듯이 내 자신이 자랑스럽다. 겨우2만원이지만 나는 이것으로 영화를 보거나 친구들과 PC방에서 돈을 쓰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을 얻는다.
그리고 그 기쁨은느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벌써 봉사를 시작한지 6년째 접어들고 있다.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 봉사나 기부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며, 내 것을 조금만 나누면 몇 배로 행복해진다는 사실을 저절로 알게 되었다. 물론 힘들 때도 있었고, 내 능력이 너무 작아서 안타까울 때도 있었지만 한결같이 봉사가 끝나고 나면 늘 뿌듯하고 행복했다.

 

 사실 봉사상을 받기위해 봉사체험수기를 쓴다는 것 자체가 참 부끄럽다.
하지만 내가 초등학생의 글을 읽고 그랬듯이,내 글을 읽고 누군가 봉사에 대한 생각이 바뀐다면, 한 사람이 열사람의 생각을 바꾸고, 열사람이 각각 또 열사람의 생각을 바꾸면서 전염병처럼 퍼져나가 가까운 미래에 우리 사회가 기쁨과 희망이 가득한 사회가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본다.